모든 ‘왜’가 우리를 본질로 데려가지는 않아요
'왜'는 분명 힘이 센 질문이에요.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이 선택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을 때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들고 본질을 찾아 들어가고, 결국 생각지 못한 답을 찾아낼 때가 많죠. 그런데 ‘왜’가 들어간 모든 질문이 우리를 본질로 인도하는 건 아니에요. 어떤 ‘왜’는 아무리 질문을 파고들어도 바닥이 나오지 않아요. 오히려 파고들수록 질문 속에 갇혀 버릴 때가 많죠.
좋은 질문과 피해야 하는 질문을 가르는 기준은 의외로 단순해요. 내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인가, 그리고 그 답이 다음 행동으로 이어지는가. 이 두 가지를 만족하지 못하는 질문은 우리를 성찰이 아니라 반추로, 명료함이 아닌 애매모호함으로, 이해가 아닌 판단과 비난으로 데려가기 쉬워요.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습관처럼 던지기 쉬운 네 가지 위험한 질문의 유형과 그 질문을 어떻게 바꿔볼 수 있을지 함께 살펴보려 해요.
이미 끝난 일에 던지는 왜
"그때 왜 그 회사를 선택했을까?" "왜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을까?"
지나간 일에 던지는 '왜'가 위험한 건 그 질문이 우리를 너무나 많은 답으로 인도하기 때문이에요. 하나의 선택에는 수많은 이유가 얽혀 있고 명료한 이유를 찾기 힘들 때가 더 많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내가 처한 상황과 기분에 따라 내 입맛에 맞는 답을 고르곤 해요. 어떤 날은 내가 모든 결과의 원인이 되었다가 또 다른 날은 부모가, 친구가, 사회가 결과의 원인이 되어 심판대에 오르곤 하죠. 같은 과거를 두고 매일 다른 판결문이 나오는 거예요. 게다가 과거는 이미 닫혀 있어요. 설사 정확한 원인을 찾아낸다고 해도 되돌릴 수 없어요. 그래서 이미 끝난 일에 던지는 질문은 우리를 자꾸 뒤로 걷게 만들고 끊임없이 반추하게 만들 뿐이죠.
이렇게 바꿔보세요.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도돌이표를 만들게 되는 질문을 그만두고 내가 답할 수 있고, 그 답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질문으로 바꿔보세요. "그 경험에서 내가 배운 건 무엇일까?" "그때의 나는 무엇을 지키고 싶었을까?"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와 같은 질문은 과거를 반추하는 대신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게 도와주는 질문이에요.
타인에게 던지는 왜
"그 사람은 왜 나한테 그렇게 말했을까?" "왜 답장이 없지?"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봤을까?"
이 질문의 답은 그 사람의 머릿속에 있어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 그 사람의 머릿속에도 정확한 답은 없을 거예요. 이 질문은 우리 머릿속에서 수많은 가상의 시나리오를 쓰게 만들어요. 문제는 우리 뇌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지게 설계되어 있다는 거예요. 위험을 미리 감지하는 게 생존에 유리했으니까요. 그래서 "바빴나 보다" 대신 "나를 싫어하나 보다"가 먼저 떠오르고, 어느새 상상 속에서 혼자 상처받고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판단해 버리곤 해요. 무엇보다, 설령 정확한 이유를 추측해 냈다고 하더라도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 사람의 마음은 내 소관이 아니거든요. 내 소관인 건 오직 내가 무엇을 느꼈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뿐이에요.
이렇게 바꿔보세요. 추측을 사실과 감정으로 분리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훨씬 가벼워질 수 있어요.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일까?" "나는 그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지?"와 같이 사실과 추측을 분리해서 질문해 보세요. '저 사람이 나를 무시했다'는 추측이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서운했다'는 확실한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정말 궁금하다면, 내 머릿속의 추측과 상상을 멈추고 상대방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어요. 머릿속의 추측으로 누군가를 오해하고 판단해 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예요.
우주에 던지는 왜
"나는 왜 태어났을까?" “우주는 왜 만들어진 걸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언뜻 보면 철학적이고 멋져 보여요. 이 질문을 깊이 파고들어 답을 찾으면 삶의 정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하지만 이 질문은 사실 매우 위험한 질문이에요. 답해줄 주체가 없고, 명료한 답을 찾을 수도 없는 질문이거든요. 무엇보다 이 질문은 질문 자체에 큰 오류를 가지고 있어요.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은 태어남에는 어떤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질문이거든요. 열린 질문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닫혀있는 질문인 거죠. 우리가 이런 질문을 붙잡는 이유는 세상에 어떤 질서가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질문은 우리를 행복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들어요. 확실한 답을 알 수 없고,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질문은 우리를 무기력하고 공허하게 만들기 쉽거든요.
이렇게 바꿔보세요. 주어진 답을 찾는 질문에서, 내가 답을 만드는 질문으로 건너가세요.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내가 만들고 싶은 세상의 모습은 무엇일까?” "이 경험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가 되기를 바라는가?"와 같은 질문을 해보는 거죠. 목적과 의미는 어딘가에 이미 놓여 있어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매일의 삶을 통해 우리가 조금씩 만들어 가는 것임을 기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