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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레터

vol.25 과연 쓸모없는 상상일까?

2026.02.19 11:30 · 원문 보기 ↗

주변을 둘러보며 오늘날 우리는 참 바쁘고도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휴식마저 다음 일을 위한 충전이어야 할 때가 많고요. 그러다 보니 가끔 목적 없는 공상에 빠질 때면, '아,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하며 괜히 마음을 조급하게 보채곤 합니다. 

하지만 팽팽하게 당겨진 일상의 긴장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건, 사소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상상들이 아닐까 싶어요. 이번 포포레터에서는 님의 머릿속을 유영하는 비밀스럽고도 찬란한 생각들을 마음껏 응원하려 합니다. 오늘 하루만큼은 효율을 우선하기보다는 잠시 공상을 즐겨 보는 건 어떨까요?


From Editor

  
이야기를 상상하기
머릿속에 문을 그려보기  

눈을 감고, 머릿속에 가상의 문을 하나 그려 보세요. 문을 다 그렸다면, 그 문 너머의 방에서는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세요. 문을 열었더니, 어떤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나요? 
서랍 속의 만년필

서랍 깊숙한 곳에서 오랫동안 쓰지 않아 잉크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만년필을 꺼냈다고 상상해 보세요. 미지근한 물에 펜촉을 담그자, 굳어있던 색깔이 천천히 피어오르며 물속으로 번져 나갑니다. 이 만년필이 품고 있던 색은 어떤 색이었을까요?
지구와 달 사이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의 단편 소설 <달과의 거리> 속 설정처럼, 지구와 달이 사다리를 걸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져 우리가 직접 두 발로 그 사이를 오갈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먼 하늘에만 떠 있던 세계가 내 앞에 다가온다면요.

장면 너머의 이야기를 따라
일러스트레이터 최진영


산책길에서 마주친 낡은 간판이나 평범한 풍경들. 최진영 작가는 누구나 무심코 지나칠 법한 장면 너머의 작은 이야기들을 상상합니다.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잘 닦인 매끄러운 이미지보다 종이 위에 남은 손의 감각과 솔직한 떨림이 먼저 전해집니다. 단정하게 정제된 선보다는 투박하지만 따뜻한 진심이, 긴 설명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생동감이 기분 좋게 다가오지요.

이러한 감각은 분명한 목적이나 결과를 향해 나아가기보다, 스쳐 지나간 생각과 조각난 상상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만들어집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지는 특유의 위트와 건강한 에너지는, 아마도 이런 사소한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거예요. 최진영 작가의 다정한 시선을 함께 따라가 보았습니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를 위한 통로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낙서들.
이것이 바로 ‘건강에 좋은 낙서’였어요.


그렇게 그리기 시작한 낙서들이 결과적으로
저를 돌보는 가장 건강한 방식이 되더라고요.

작가님 스스로를 소개할 때 쓰는 ‘건강에 좋은 낙서’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어요. 어울리는 듯 낯선 두 단어의 조합인 것 같은데요. 이 단어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나요?

대학 졸업 무렵, SNS에 그림을 올리기 위해 만든 페이지에 처음 붙인 이름이에요. 당시 제게 그림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제 안의 답답함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시작한 하나의 ‘배출구’에 가까웠죠.


돌이켜보면 대학 시절 내내 교수님이나, 해당 분야에서 권위 있는 분들의 인정을 기준 삼아 작업을 해왔던 것 같아요. 졸업과 동시에 그 기준이 사라지자 큰 혼란이 찾아왔고요. 그래서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를 위한 통로를 하나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건강에 좋은 낙서’였어요. 그렇게 그리기 시작한 낙서들이 결과적으로 저를 돌보는 가장 건강한 방식이 되더라고요.

표면 너머의 이야기를 보고 싶은 마음이
계속 상상을 이어가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작가님의 그림을 보면 엉뚱한 디테일이 많아요. 주로 산책을 하며 아이디어를 모은다고 들었어요. 최근에는 어디를 걸으셨나요?

저는 너무 매끈하게 잘 만들어진 것보다, 어딘가 허술하고 투박해서 오히려 ‘터프하게’ 느껴지는 장면들에 매료돼요. 최근에는 안양 1번가 근처를 자주 산책했는데요. 그 거리가 저에겐 보물창고 같았어요. 세기말 감성이 느껴지는 세피아톤 풍경들,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침투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간판들이요.

그 산책길에서 작가님의 ‘관찰 레이더’에 포착된 장면이 있다면요?

최근엔 본인 사진을 크게 걸어놓은 ‘장구 연습실’ 간판이나 ‘블랙홀 모텔’ 같은 이름을 보고 한참을 웃었어요.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이 동네의 블랙홀이 되어보자는 마음으로 지으신 걸까?’ 하고 혼자 상상을 이어가죠. 서울 같은 대도시라면 살아남기 어려웠을 법한, 정형화되지 않은 풍경들이 주는 희열이 있어요. 들어가 보고 싶은 풍경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름을 짓고 간판을 구상했을 순간의 상황을 상상하며 혼자 키득거릴 수 있는, 작은 즐거움이 됩니다.

그렇게 떠오른 파편 같은 생각들은 어떻게 기록해 두시나요?

일단 사진을 찍고, 혼자만 있는 채팅방에 메모를 던져둬요. 바로 그리기보다 며칠, 길게는 1년 넘게 묵혀두기도 하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지금이야. 너무 잘 그리려 하지 말고, 그냥 지금 그려!’라는 마음이 들 때 시작해요. 각 잡고 앉으면 오히려 긴장해서 그림이 딱딱해지거든요. 꼬질꼬질한 종이 위에 손에 잡히는 펜으로 슥 그려서, 휴대폰으로 대충 찍은 그림. 그런 ‘날것’의 상태를 가장 좋아해요.

정답이 없는 상상은 종종 ‘시간 낭비’로 여겨지기도 해요. 그럼에도 상상을 계속 이어가게 만드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일종의 ‘현실도피’랄까요?(웃음) 저는 지방에서 자랐고, 가정 분위기도 비교적 엄격한 편이었어요. 자유롭게 놀 수 있는 환경은 아니어서, 종이 인형을 만들어 혼자 상상을 펼치며 시간을 보내곤 했죠. 당시에는 그런 환경이 결핍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어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시간들이 상상을 자연스럽게 시작하는 방법을 익히게 해준 것 같아요.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던 경험이 쌓이면서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어떤 사물이나 풍경을 마주하면, 보이는 모습 그 자체보다 그 안에서 출발하는 생각들에 먼저 시선이 가요. 이건 왜 이렇게 튀어나와 있을까, 이 간판은 왜 이런 캐릭터를 선택했을까 같은 질문들이요. 그렇게 표면에 보이는 것 너머의 이야기를 보고 싶은 마음이, 계속 상상을 이어가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낙서를 ‘마음의 근력 운동’이라고 표현하셨죠.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기 위한 작가님만의 방법이 있을까요?

저도 여전히 협업이나 큰 프로젝트를 할 때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요. 선이 경직되기도 하고요.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검열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SNS에 ‘이건 너무 과한가?’ 싶은 아이디어들을 꾸준히 올리면서 기준이 조금씩 바뀌었어요. 제가 과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오히려 좋아해 주시는 경험이 쌓이면서, 스스로에 대한 관대함이 생겼죠.

작업이 막힐 때는 아예 다른 영역의 ‘손노동’을 해보기도 해요. 최근엔 빵 만드는 수업을 듣고 판화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재료들, 예상치 못한 결과물이 나오는 과정을 즐기다 보면 창작에 대한 긴장감이 자연스럽게 풀려요. 그렇게 생각했던 방향과 달리, 조금 어긋나고 허술하게 나온 결과물들을 보며 “그래, 이래야 내 작품 답지” 하고 인정하며 마무리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에요.

최진영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일러스트는

포인트오브뷰와 함께 한 스티커부터, 스탬프,
12색 색연필 세트까지, 다양한 문구로 만나보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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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을 두번 음미하기 위해 글을 쓴다작가 아나이스 닉의 문장을 요즘 생각하고 있어요. 포포레터 팀과 함께 나누고 싶어 보냅니다. 

◌ 이번 레터는 주말 아침에 읽었는데. 한동안 잊고 있던 아끼는 문장과 노트, 같은 것들이 떠올라 한숨 돌리게
되었습니다. 민정 에디터님께서 아끼시는 문장에 특히 위로도 받았어요. 감사합니다.

◌ 저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미술을 하고 있어요. 언제부터인가 그림 그리는 일 또는 작업을 기록하는 과정이 디지털화되었는데, 그런 사실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바뀌어서 인지조차 못했어요. 무엇 때문에 미술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잊어버리던 때에 우연히 포인트오브뷰를 방문했고, 포포레터를 알게되어 글 혹은 그림, 기록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감사해요!
Point of View
letter@pointofview.kr
18, Yeonmujang-gil, Seongdong-gu, 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