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비디오 테이프’는 기계에 넣고 재생 버튼을 누르면 저장된 화면이 똑같이 재생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뇌 속의 기억 역시 한 번 입력되면 영원히 변하지 않고 보존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죠.
최근 신경과학자들이 밝혀낸 기억의 진짜 메커니즘은 이것과 조금 다릅니다. 기억은 과거의 사건을 그대로 꺼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떠올릴 때마다 새롭게 구현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죠. 앨범 속 사진을 꺼내 보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떠올리며 하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이렇게 그린 그림들은 다 조금씩 다른 그림일 수밖에 없습니다.
뇌과학에선 이 현상을 ‘기억 재공고화’라고 합니다. 우리가 옛 기억을 떠올리는 그 순간 뇌 속 깊은 곳에 잠들어있던 기억의 상자가 열리면서 수정이 가능한 불안정 상태가 됩니다. 컴퓨터에 저장된 문서를 불러와 수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뇌는 수정된 내용을 바탕으로 기억을 다시 저장(재공고화) 합니다.
불안정 상태로 편집 기능이 잠시 활성화된 짧은 시간 동안 기억 속에 엉켜 있는 괴로운 감정만 선택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캐나다 맥길대학교 연구팀은 이 질문에 대한 가능성을 임상으로 입증해 낸 대표적인 선구자입니다.
알랭 브뤼네 신경의학과 교수 연구팀은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연구팀은 환자들에게 기억 소환 약 90분 전, 뇌의 편도체에서 공포 반응을 재저장할 때 사용하는 노르아드레날린 수용체를 차단하는 약물을 미리 복용하게 했습니다. 약효가 도달한 시점에 환자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가장 괴로운 트라우마의 순간을 짧은 원고로 읽게 해 기억의 ‘편집 기능’을 활성화했죠.
그 결과 환자들은 ‘내가 과거에 어떤 사고를 당했다’는 사건의 경과는 정확히 기억했지만,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을 흘리는 신체 반응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고 발생 사실 그 자체까진 없애지 못하지만 적어도 힘든 감정은 조절이 가능해진 셈이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연구팀 또한 비슷한 연구결과를 내놨습니다. 연구팀은 거미 공포증 등 인간의 특정 공포증이나 강박적 공포 기억에서 단 한 번의 기억 소환과 재공고화 차단 치료만으로도 힘든 감정을 수개월 이상 억제할 수 있다는 실험 결과를 공개했죠.
여기서한 발 더 나아가 최근 과학자들은 약물 투여 방식의 부작용과 한계를 넘어 가상현실과 비침습 뇌 자극같은 최신 뉴로테크 기술을 결합하는 중입니다. 과거의 공포뿐만 아니라 마약, 알코올, 도박처럼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중독’ 치료 영역으로도 발을 넓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