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트로픽이 글에 넣는
워터마크는 무언가를 몰래 ‘추가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특수문자를 심는 것도 아니고요. 클로드가 단어를 고르는 방식에 작은 규칙을 하나 넣는 기술입니다. 원리는 다음과 같아요. 거대언어모델(LLM)은 문장을 한 단어씩 써 내려갑니다.
“오늘 날씨는 춥고…”
그다음 단어로 ‘흐린’을 써도 되고 ‘잿빛’을 써도 됩니다. 뜻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한 편의 글에는 이렇게 어느 쪽을 골라도 큰 상관이 없는 선택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평소 클로드는 비슷한 후보 가운데 하나를 무작위로 고릅니다.
워터마크를 적용하면 이 무작위 선택에 앤트로픽만 아는 규칙이 하나 더 들어갑니다. 한두 단어만 봐서는 알 수 없지만 긴 글 전체를 훑어보면 특정한 선택이 반복되는 겁니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규칙을 아는 앤트로픽은 “이 글을 클로드가 썼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할 수 있는 거죠.
앤트로픽은 이를 모노폴리 게임에 빗대 설명합니다. 원래 모노폴리에서는 주사위를 굴려 말을 옮깁니다. 그런데 주사위 대신 원주율, 파이의 숫자를 차례대로 가져다 쓴다고 해보겠습니다. 임의의 자리에서 출발해 3, 1, 4(3.141592...)처럼 숫자를 하나씩 꺼내 주사윗값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게임을 하는 사람에게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말은 여전히 무작위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게임 결과도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모든 이동을 모아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파이의 숫자 배열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게임은 주사위가 아니라 파이를 이용했군”이라고 알아낼 수 있는 것처럼요.
클로드의 워터마크도 비슷합니다. 읽는 사람의 경험은 그대로 두면서, 나중에 클로드가 관여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그래서 워터마크를 넣는다고 글이 길어지거나 비용이 더 드는 것은 아닙니다. 추가되는 글자나 토큰이 없기 때문인데요. 속도에 미치는 영향도 거의 없다는 게 앤트로픽의 설명입니다.
글의 품질은 어떨까요. 앤트로픽이 채택한 방식은 구글 딥마인드가 2024년 공개한 ‘SynthID-Text’입니다. 구글은 실제 제미나이 이용자 일부에게 워터마크가 적용된 답변을 보여준 뒤 ‘좋아요’와 ‘싫어요’ 반응을 비교했는데요. 그 결과 워터마크가 없는 답변과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를 찾지 못했습니다. 사람 평가자에게 두 답변을 나란히 보여줬을 때도 품질 차이를 구별하지 못했고요.
문득 이런 생각도 듭니다. 클로드의 결과물이 무작위가 아니라 ‘확률’을 갖게 된다면 결과물의 품질이 저하되지 않을까요. 전문가들은 대규모 언어모델이 원래 확률에 기반해 단어를 선택하기 때문에 워터마크는 기존의 무작위성을 통제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수준인 만큼 이용자가 느낄 정도의
성능 저하는 없을 것으로 보고 있어요.
물론 어디에나 워터마크를 새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기술은 클로드가 여러 표현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있을 때만 작동합니다. 예를 들어 “2 더하기 2는” 이 물음 다음에는 ‘4’ 말고 고를 답이 없습니다. 사실을 정확히 써야 하는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곳에는 워터마크가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코드 역시 정답이 정해진 경우가 많습니다. 단어를 마음대로 바꾸면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코드 본문에는 워터마크가 적게 남고 표현을 바꿔도 문제가 없는 주석 같은 부분에 주로 흔적이 생길 수 있어요. 사람이 직접 쓴 글을 클로드에게 맞춤법만 고쳐 달라고 맡긴 경우도 비슷합니다.
거의 모든 단어가 사람의 것이고 클로드가 고른 단어는 몇 개 되지 않기 때문에 워터마크가 검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글 전체를 다듬거나 문장을 대폭 다시 써달라고 했다면 클로드가 선택한 단어가 많아져 흔적도 커집니다. 글의 길이도 중요합니다. 짧은 제목이나 한두 문장만으로는 패턴이 충분히 쌓이지 않습니다. 긴 글일수록 클로드가 여러 차례 단어를 고르게 되고, 그만큼 워터마크를 찾아낼 확률도 높아집니다.
클로드의 기술 “관여했을 가능성”
편집하면 지울 수 있을까요. 앤트로픽은 단어 몇 개를 바꾸거나 문장을 조금 다듬는 정도로는 워터마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모든 문장을 통째로 다시 쓰면 흔적은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모든 단어를 다시 썼다면, 그 글을 여전히 AI가 썼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앤트로픽은 왜 지금 이 기술을 넣었을까요.
자발적인 실험이라기보다 유럽연합의 AI법에 대응한 조치입니다. 유럽에서는 2026년 8월 2일부터 생성형 AI 업체에 AI가 만든 콘텐츠를 기계가 식별할 수 있도록 표시할 의무가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앤트로픽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오픈AI 등과 함께 관련 행동규범에 서명했고, 새로 출시하는 클로드 모델에 워터마크를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유럽에서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앤트로픽은 현재 지역별로 워터마크를 안정적으로 나눠 적용할 방법이 없어 전 세계에서 사용하는 클로드에 같은 방식을 적용한다고 밝혔습니다. 앞으로는 이용자나 외부 기관이 클로드의 워터마크를 검사할 수 있는 탐지 API도 공개할 예정입니다.
여기서 이용자들이 불안해한 지점이 드러납니다. 워터마크가 알려주는 것은 “클로드가 이 글에 관여했을 가능성”입니다. 하지만 이 신호만으로는 클로드가 처음부터 글을 썼는지, 사람이 쓴 글을 많이 고쳤는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직접 쓴 글이라도 클로드에게 문장을 대폭 다듬어달라고 맡겼다면 워터마크가 검출될 수 있습니다. 기계는 “클로드의 손길이 있었군요”라고 말했을 뿐인데 학교나 회사는 “그러면 네가 쓴 글이 아니군요”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기술이 붙인 작은 꼬리표가 사회에 들어오는 순간 훨씬 큰 낙인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앤트로픽도 워터마크는 저작권이나 저자가 누구인지, 법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런데도 발표 직후 일부 이용자들이 “구독을 취소하겠다”고 반발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워터마크는 AI가 쓴 글을 완벽하게 색출하는 탐정이 아닙니다. 클로드가 글에 손을 댔을 가능성을 알려주는 희미한 흔적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그 희미한 흔적을 우리가 앞으로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게 될지입니다. ‘AI의 도움을 받았다’는 정보에 그칠까요. 아니면 ‘사람이 직접 만들지 않았다’는 낙인이 될까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AI가 만드는 글에는 이런 질문까지 함께 따라붙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