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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의 파도를 타는 사람들

MORBID-19 · 2026.09.03 09:00 · 원문 보기 ↗

요즘에 내가 제일 꽂혀 있는 아이디어는 역사의 종말이다. 이는 프랜시스 후쿠야마라고 하는 아저씨가 쓴 책의 제목이다. 이 책은 소련이 붕괴하던 90년대 초에 나왔는데 지금도 이 책의 제목은 하나의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나도 책의 내용을 들여다보기 전까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제목으로만 이해했다. 바야흐로 이념 간의 전쟁이 끝났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이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모두 영원히 평화를 누린다는 것. 이게 끝인줄 알았다.

어느 날 갑자기 챗지피티에게 역사의 종말에 대해서 물어보기 시작하며 그 뒤에 더 놀라운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은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이다. 여기서 말하는 최후의 인간은 우리 모두를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큰 전쟁도 없었고, 6.25 전쟁과 일제강점기는 그저 역사책의 내용일 뿐이다. 우리는 싸워야 할 전쟁도 없고 지켜야 할 사상도 없다. 우리는 그저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궈놓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번영 속에서 안락한 삶을 즐기며 인스타그램으로 남의 인생을 지켜본다.

평화와 번영은 소비문화와 허무주의를 낳았다. 우리는 소비로 자아를 완성하고, 새로운 물건들로 공허함을 채운다. 평화와 번영은 절망과 타락으로 이어졌다.

우리 세대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식당에서 서빙하고 있어. 화이트칼라의 노예처럼. 우리는 광고에서 나오는 차와 옷을 쫓으며 필요하지도 않은 쓰레기들을 사기 위해 싫어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지. 우린 역사의 가운데에 끼어 있는 세대일 뿐이야. 목적도 없고 설 자리도 없어. 우리에게는 위대한 전쟁도 없고, 대공황도 없어. 우리의 위대한 전쟁은 영적인 전쟁이고 우리의 대공황은 우리의 삶 그 자체야. 우리는 모두 TV를 보며 언젠가는 백만장자, 영화배우, 락스타가 될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어. 그리고 우리는 지금 아주 많이 빡쳐 있어.

파이트클럽에서 타일러 더든은 방황하는 남자들에게 길을 제시한다. 이 남자들은 하기 싫은 일을 버리고 결사조직을 만들어 도시의 카드 회사 건물들을 폭파시킨다. 그러나 타일러 더든은 진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작중의 주인공이 만들어낸 이상이다. 이미 죽었다는 듯이 사는 비밀 테러 집단의 리더. 타일러 더든이라고 하는 캐릭터가 지금도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는 건 아마 최후의 인간이 바라는 이상향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나는 카카오뱅크와 토스증권 사무실을 폭파시킬 수 없다. 난세의 간웅은 황제가 되지만 평화로운 시대의 테러리스트는 그냥 미친놈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살아가는 것뿐이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역사의 끄트머리에서. 그래서 나는 칼리 유가를 서핑한다(surf the Kali Yuga)는 말을 좋아한다. 최후의 인간은 마지막 시대의 파도에 몸을 맡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