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box
반비 책타래

#호외: '여자친구'와 '대통령 선거'의 상관관계

2025.07.14 11:30 · 원문 보기 ↗

어느 날, 메일함에 도착한 한 편의 투고 원고. 파일을 열자마자 단번에 원고를 읽었어요. 한때 좋아했던 몇몇 시트콤이 떠오르는 신랄한 유머.(다른 건 몰라도 유머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한 편임을 자부합니다.) ‘일터란 어디나 그런가?’ 하고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엄청난 핍진함. 때때로 눈물 한 방울 똑 떨어지게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들. 무엇보다 재미있어서 책으로 만들고 싶다고 느꼈지요. 

곧 책으로 완성될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를 함께 읽고 싶어요. 원고의 일부를 책타래를 통해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와 ‘레즈비언 데이트’가 대체 무슨 관계냐고요? 


💥💥💥

D-116

2021년 11월 13일 토요일


엄마를 잃었다.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엄마를. 서울의 방 두 개짜리 작은 집 그보다 더 작은 침대 속에서. 진한 남색 이불을 온몸에 두른 나는 페이스타임으로 엄마를 잃었다.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뜻이다. 아아, 레즈비언 연애의 징그러움이여.

원래는 샌프란시스코에 가려고 했다. 5년 넘게 만나던 여자친구와 떨어져 지낸 지도 1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여행이 몇 번이나 취소되었다가 마침내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출국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겨울을 통째로 따뜻한 도시에서 보내려 했다. H네 집 테라스나 바로 그 앞 해변에 눕듯이 앉아 논문을 쓸 계획이었다. H는 우리가 함께 듣던 와인 세미나에서 추천한 나파 밸리 와인을 한 박스 주문해 놓았다고 했다. 바다와 와인과 섹스. 철학과 석사 과정을 수료하고도 한참을 미루던 졸업 논문을 완성하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했다.

충분히 사려 깊은 내 친구들은 위로하기에 앞서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너희는 정말 백년해로할 줄 알았는데.” 남의 연애에 섣부른 예측은 절대 하지 않는 신중한 친구조차 말했다. “곧 H에게 연락 와서 다시 만나겠지.” 주변인조차 부정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이별. 하지만 H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였다. 끝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롱디는 원래 이런가? 어제까지 서로 “사랑해.”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다가 오늘은 갑자기 헤어지다니. 물론 울며 매달렸다. 연애는 참 이상하다고. 두 사람이 동의해야만 시작하는데 한 사람이 통보만 하면 끝이 난다고. 너무 가혹하다고.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 그는 칼같이 말을 잘랐다. 다음 달이면 내가 거기로 가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내가 지금 당장 갈 테니 비행기 표 끊겠다는 어떤 설득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얼굴을 맞대고 마음을 맞춘 채로 협의할 수 있는 이별이란 환상인가.

연애는 끝났다. 모든 것이 사라진 와중 다행히도 비행기 티켓만은 수수료 없이 취소할 수 있었다. 코로나 시대의 유일한 덕이었다. H가 당장이라도 전화해 싹싹 빌면서 미안하다고, 내가 실수했다고 하지는 않을까? 그 희망을 혼자서 놓을 용기는 없었다. 친구들을 줌으로 모아 내 인터넷 창을 공유했고, 다 같이 “하나, 둘, 셋” 하고 티켓 취소 버튼을 눌렀다. 나는 울지 않았다.


이별 후에 할 일
  1. 조이(레즈비언 소개팅 앱)에 사진 업로드.
  2. 인스타그램에서 커플 사진 지우기.

눈물이 나려고 할 때마다 통속적이고 뻔한 이별의 과정을 충실히 수행했다. 내 나이 서른. 좀 더 성숙하고 멋진 이별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할 수 있는 만큼 뻔한 방식으로 난리를 쳐야만 속이 시원했다. 아! 넷플릭스 가족 계정에 등록된 H의 프로필도 지워 버렸다. 모바일로는 할 수 없다기에 굳이 컴퓨터까지 켜서. 정말 내가 이렇게나 치사하다. 


  1. 넷플릭스 가족 계정에서 H를 추방하기.
  2. ○○당 대선 캠프에 들어가기.

갑자기 대선 캠프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에게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내려고 했던 3개월이 대선 기간과 얼추 들어맞는다고 설명했다. 그게 이유의 다는 아니었는데. 단순히 몰두할 대상이 필요해서였을까? 아니면 H에 대한 복수심에서였을까? 

샌프란시스코로 떠나고 H는 늘 한국 밖에 있어서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차별과 분노, 부조리에서 한 발 떨어져 살기 때문에 우울증이 심해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글쎄, 나도 외국에 살아 봤지만 내가 겪은 상황은 반대에 가까웠다. 사회의 맥락 속에서 아예 지워진 사람, 심지어 투쟁의 주체도 되기 힘든 사람. 소수자가 아닌 투명 인간으로 살아가는 경험을 유쾌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저 지독하게 외로웠다. 어떤 상황에서 더 행복할 수 있는지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H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나는 여기서 싸우겠다고. 모두가 그럴 수는 없지만, 난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도 ‘탈조선’을 꿈꾼 적이 있었다. 20대 초중반에는 그 막연한 희망이 아주 크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너를 만나고 비로소 한국에 살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어.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면 이 못생긴 도시 서울도 꽤 낭만적이고, 아름답다고. 물론 화나고 스트레스 받는 일도 많지만, 충분히 투쟁하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나를 만나고 나서야 외국에 나가고 싶어하더라. 내 덕분에 유학을 할 용기가 났다고도 했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내 덕에 나와 떨어져 지낼 수 있게 되었다니? 난 사실 서운했어.

  

💧💔💧

‘탈조선’하고 결별을 통보한 여자친구에게
복수하기 위해 대선 캠프에서 일하기로 결심하다!

낮에는 여자 대통령을 만들고
밤에는 레즈비언 데이트를 한 117일의 일기 


심미섭은 내가 기다려 온 작가다. 적나라할 만큼 솔직하고 처절할 만큼 분투하는 이런 레즈비언 이야기를 드디어 뜨겁게 접할 수 있어서 기뻤다. 심미섭은 정면 승부를 한다. 자신의 존재만으로 이 시대를 증명해 보이겠다고 선언하고,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으로 완벽하게 실천해 낸다. 심미섭의 이 산문집을 읽고서야 나는 알았다. 내가 항상 기다려 온 것은 새로운 세계가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사람이었다. —임솔아(소설가·시인)

동성 애인과 막 헤어진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홧김에 진보 정당의 대선 캠프에 들어가 새로운 일상을 꾸리며 써 내려간 ‘페미니스트 난중일기’. 이런 박진감 넘치는 일기는 본 적이 없다. 심미섭은 편집자 엄마에게 물려받은 매끈한 언어를 횃불처럼 쥐고 레즈비언 연애부터 진보 정치까지 온갖 모순과 감정으로 가득한 삶의 한가운데를 당당히 가로지른다. 12·3 계엄 직후 첫 탄핵 표결을 앞둔 국회 앞 광장에서 거침없이 페미니스트의 이름으로 ‘소수자 혐오 없는 광장’을 요구한 심미섭이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어 왔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권한다. —장혜영(전 국회의원)

선거 캠프, 광장, 망한 연애, 그리고 레즈비언 앱에서의 만남까지. 여성·성소수자·진보 정치 같은 말 옆에 레즈비언 앱·철학·취향 같은 단어들이 놓이며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전혀 연결되지 않았을 단어들이 재조립된다. 말할 자리가 없으면 스스로 무대를 만들고 동료를 모아 방파제를 짓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심미섭은 이제 책을 통해 자신이 짓고 만들어 낸 세계로 초대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해도 될까 망설인 적이 있는 사람에게 특히 권하고 싶은 책이다. —권김현영(여성학자)

명품 백 대신 철학 책을 집어던지며 운다. 사유의 펜트하우스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며 운다. 포르쉐 대신 속도계에 마하를 띄우는 반야의 등에 업혀 질주한다.(아니, 업힌 쪽이 반야였나?) 이토록 고급스러운 슬픔은 처음이라는 뜻이다. 심미섭은 평생을 고뇌하고 되돌아보고 읽고 앓으며 자신의 슬픔을 설명할 말들을 악착같이 그러모은 거부(巨富) 같다. 그렇게 모은 언어로 이 책에서 엮어 낸 것은 문장이 아니라 탯줄이다. 이제 섹시 카우보이 복장으로 등장한 심미섭은 그 탯줄로 올가미를 만들어 빙빙 돌린다. 지난날 처절하게 사랑했던 엄마‘들’에게 탯줄을 되돌려 줄 시간이다. —현호정(소설가)



7월 21일 월요일, 두 번째 일기가 찾아옵니다!✊

(주)사이언스북스
banbi@minumsa.com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1길 62 강남출판문화센터 6층 02-515-200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