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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칠 곳이 없다_[산을오르는아이들]_윤경

2026.05.18 10:01 · 원문 보기 ↗
도망칠 곳이 없다

산을 오르는 아이들 / 윤경

ⓒ 2026.윤경 All rights reserved.  

봄빛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때론 요란하게, 때론 찬란하게. 모래시계가 흐르듯 시간이 지나가는 와중에도 랙이 걸리듯 멈춰지는 순간들이 있다. 내 시간은 더 이상 이 세상의 시간과 함께 흐르지 않는 것 같은 아득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다음 장면으로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마음에 각인된 이미지. 아이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어른의 시간을 무심코 멈추게 만드는 강렬한 힘이 있다.

 

아이들이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때 나는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가 현실 세계로 뚫고 오는 요정들을 보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순수한 세계가 품고 있는 작고 눈부신 결정체가 단단하게 껍질을 싸고 있는 어른의 마음을 슬그머니 벗겨 놓는다. 그 기분이 딱히 싫지가 않다. 나름의 질서 정연한 일상의 속도를 아이들이 마음대로 조정하는 걸 보면서 나는 한없이 무력해진다. 순수하다는 건 가끔 위협적이다. 나를 지배하고 있던 복잡한 생각과 감정들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살리는 돌봄의 삶을 살아간다. 식물을 심고, 사람들을 만나고, 장을 보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운전을 하고, 사색에 잠기고,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고, 숲을 거닐다가, 글을 쓰면서도 나는 보살피는 영역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만다.

매일을 살아가며 몸에서 감각되는 느낌이 들어 올리는 진실은 그동안 머리에 정리되어 있었던 것들을 새하얀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것만 같다. 나는 역시나, 확실히, 돌봄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홀로 어딘가 처박혀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와도 그 사실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삶 곳곳에서 점점 더 우리가 서로를 돌보는 존재로 되어간다는 감각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그건 아이들을 돌보는 나의 사회적 역할, 자연에서 치유를 받는 돌봄의 힘 때문 만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돌봄의 손길들이 차곡차곡 모여서 비추어주는 길은 어떤 곳일까.

'새삼스레'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늘 알던 것을 새롭게 알아차리는 감각. 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리송하고 낯설게 다가오는 이 느낌들이 돌봄의 세계를 한층 더 풍요롭게 만든다고 본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매일같이 새 아침이 열린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매일 보는 아이들과 사람들에게서 내가 더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공기의 흐름은 더 다정해지고 세심해진다.

  ⓒ 2026.윤경 All rights reserved.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위해서 이 깊은 시골에서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본다. 어떤 대단한 교육 가치를 위해서도 아닌, 그저 매일같이 쑥쑥 자라는 아이들의 생기를 보고 싶었기 때문 아닐까. 또한 나는 어떤가, 나는 어떨 때 내가 살아 있다고 느끼는가. 사회에 흐르는 지배적인 감각 차원에서 조금은 비껴나서, 가장 작은 일상 속으로 들어와, 더 민감하게 감각하고 싶었기 때문 아닐까. 자연 가까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존재들과 좀 더 다층적인 차원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조금은 눈빛이 다른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처럼 너풀거리는 사람은 온전히 안정감을 느끼는 장소와 사람과 환경이 중요하다. 그래야 나 자신과 아이들을 잘 보살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의 삶은 결코 한가롭지만은 않다. 나 혼자 감당도 못할 일들이 논과 밭에서는 기다리고 있고, 개성 강한 사람들사이에서 내 자리를 지켜내려고 마음을 여미게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공기 속에 흐르는 느린 정서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다 내 할 일을 곧잘 놓치고 만다. 글 쓸 시간이 안나와서 마음 앓이를 했다는 이야기를 이토록 길고 어렵게 어물거리면서 하고 말았다. 다르게 말하면, 시간은 있으면서도 마음 머리를 잘 돌리지 못하는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모든 상황을 감내하면서도 써야겠다는 마음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누군가를 탓하면서 내 할 일을 못했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내 마음을 정성껏 돌보는 일이다.


해남에 살면서 그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서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는 현상이 자꾸 나타난다. 행복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네!


  ⓒ 2026.윤경 All rights reserved.    

글쓴이 / 윤경
논과 밭, 산과 바다를 어슬렁거리며
자연 속에서 아이들과 성장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마음을 어루만지며 살고 싶습니다. 

yoon.vertclair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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